SUNMIN LEE

울타리, 혹은 프레임의 안과 밖에서 사진으로 살림하기

최영하 (독립큐레이터, 사진비평)

이선민은 프레임의 안과 밖에서 건강하고 투명하게 사유하는 작가다. 또한 프레임의 안에 있으면서 프레임 밖의 세계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하여 지치지 않고 길게 작업하는 현명한 사진가다. 그녀의 초기작업 <황금투구>로부터 <여자의집Ⅰ,Ⅱ>, <트윈스(Twins)>로 이어진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도계프로젝트>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이선민의‘주제 찾기’가 전형적인 한국적 가족상황에서 여성적인 의식과 경험에서 나온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이 후속 작업으로 책갈피 넘기듯 정교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일련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자들의 소소한 일상의 풍경이 담긴 <여자의집Ⅰ>으로부터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를 보여주는 <여자의집Ⅱ>까지, 이선민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주제를 통해 권력과 권력의 바깥에 있는 것 혹은 프레임의 안과 밖이 무엇인지를 감상자로 하여금 스스로 묻게 한다. 그녀는 이처럼 대가족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위치, 가족의 의미와 함께 여성들이 겪는 다층적이고 다성적인 경험들, 혹은 여성들의 삶에 존재하는 매우 생생하고 불안한 문제들을 파인더로 세세히 살피면서 작품을 통해 두꺼운 텍스트로 만들어내고 있다. 또한 이선민의 최근 작업 <도계프로젝트>에서는 가장 근대적인 공간, 광산촌을 배경으로 여성과 가족에 대한 의미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전 작업에 비해 엄격한 형식적 과정(카메라 포맷, 라이팅, 프레이밍, 인물과 공간의 연속과 불연속의 변증법)을 거치며 공간과 시간을 긴장감 있게 재구성하면서 독특한 사진문법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선민의 작품들 속에 푹 빠져 지낸 시간 동안 위대한 것과 사소한 것, 권력과 권력의 바깥에 있는 것 혹은 프레임의 안과 밖이 무엇인지 내게 묻는 시간들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작품을 통해 터득해가듯 가부장적인 상황 속에서도 생명을 보듬어 조화롭게 하는 주체로 우뚝 서‘사진으로 살림하는’재미를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허위의식 혹은, 권력의지 <황금투구>

한 작가의 개성이 어디에서 발원하는지 알려면 일상의 많은 시 ․ 공간적 질료 가운데 ‘왜 어떤 것을 선별적으로 캐스팅했고 그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 주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곳엔 작가의 고유한 체험과 문화적 코드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과 함께 매체를 다루는 방법,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시각적 알레고리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이선민은 초기작품인 <황금투구>(1996)에서 권력의 상징적인 인물인 카이사르(Caesar, Gaius Julius, BC 100.7.12~BC 44.3.15)를 캐스팅한다. 카이사르는 서양역사에서 큰 영향을 남긴 사람 중의 하나로 로마의 권력을 한 몸에 집중시켜 비극적 종말을 맞은 인물이었다. 전쟁터에서 어찌나 신속하게 승리하던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고 전황을 보고할 수 있을 정도로 용맹했고 자신의 권력을 돋보이게 할 만한 칭호는 모조리 갖다 붙이며 원로원으로부터 전쟁과 평화에 대한, 그리고 국가의 세입을 장악할 모든 권력을 획득해냈다. 이선민에게 경상도 출신의 자수성가한 다분히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가 카이사르로 자리한다. 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들어야 식사를 시작할 수 있고, 아버지가 귀가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하니 짐작할 만하다. 게다가 그녀의 성장기에 대통령 저격사건과 군부의 쿠데타, 너무도 혼란스러운 80년대가 있었다. 그녀는 그 기억들을 첫 작업의 소재로 무난히 소화해낸다.

<황금투구>는 명화나 역사적인 장면/인물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하는‘타블로 사진(Tableau photography)’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인물의 소품이나 제스처, 작품의 양식적 구성을 통해 효과적인 내러티브를 창안해내는 방식인데 이 작업에서 놀라운 것은 인물섭외에서부터 배경제작, 소품준비, 촬영까지 홀로 진행하면서 쏟아냈을 그녀의 에너지다. 작가는 실제 연극을 하는 남성배우를 캐스팅하고, 직접 무대를 제작한 후 그들의 연기를 감독하며 누가 봐도 명료한 콘셉트 아래 꼬박 2년여의 시간과 공을 들였다. 그래서 이 사진 앞에서 관람자는 자동적으로 사진 속 인물의 성격을 더듬어보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녀 사진 속 카이사르는 철저하게 그려진 원근법적인 공간(배경) 앞에서 유약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그‘유약함’은 모더니즘 이후 과대평가 되어온 허위의식(마르크스)이고 욕망(프로이드)이고 권력의지(니체)이며 원근법적 공간을 2차원의 평면에 가장 잘 옮겨놓는 상처받기 쉬운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이다. <황금투구>는 작가의 초기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사진매체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프레임’과‘시간/존재', ‘공간/원근법’에 대해 다층적인 모색을 시도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에서 프레임은 권력의 상징, 카이사르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안으로는 내용을 정리하여 중심과 틀을 잡아주고, 밖으로는 이미지를 주위로부터 분리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이미지내의 각 요소들을 세팅함과 동시에 주체와 관람자의 위치를 정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세팅된 프레임 안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는, 하지만 실존했던 인물을 사람이 보는 실제시각이 아닌 카메라가 보는 원근법적 시각(본래 원근법적 시각은 한쪽 눈, 고정된 시선, 실제가 아닌 허구의 시각이다)으로 다시 부활해낸다.
지금 봐도 흥미롭고 재미있는 작업을 두고 작가는‘그 당시 나의 욕심과 한계가 그대로 드러난 쑥스러운 작업이다. 세상의 모든 권력이 허무하다는 생각에 시작하였지만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작업은 권위적이었던 아버지와 나름의 화해를 시도한 성인식 같은 작업’이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이 초기 작업을 통해 향후 그녀는 상황에 맞는 탁월한 인물의 캐스팅 능력과 공간구성, 공간과 인물의 배치가 마치 세트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린 그녀만의 미장센을 만들어낸다.

프레임의 안과 밖에서 응시하기 <여자의 집Ⅰ, Ⅱ>

똑같은 작품인데, 처음에는 무심히 흘려보았다가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보면 그 느낌이 조금씩 달라지고 새로워지는 작품이 있다. 바로 이선민의 <여자의 집Ⅰ, Ⅱ>(1999~2004) 시리즈가 그렇다. 그것은 집안에서의 여성의 일상이라는 것이 어딜 가나 비슷하게 일어나는 풍경이고, 또한 관람자의 일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데서 나오는 모종의 위안 같은 것이리라.
그다지 특별한 일도 없고 어제 했던 행위를 오늘 그 시간에 반복하는 결코 변할 것 같지 않은 하루하루, 주기적이고 순환하며 반복되는 일상의 삶이 사진작품의 주요한 이야기꺼리로 등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때론 너무도 진부하고 하찮게 보이기까지 한 일상의 풍경/사물들이 디지털 사진이 아날로그의 전통을 대체하는 시대에 대형카메라로 포착된 후 대형프린트로 제작되며 관람자의 시선을 갸웃하게 하고 있다. 일상의 삶은 고대에는 합리적인 철학적 삶과 반대되는 삶이었고, 중세에는 영적이고 영원한 생활과 대비되는 의미의 속된 영역, 육적인 영역, 일시적 영역으로 파악하며 부차적 의미의 것이었다. 그러다가 근대 신분제 사회의 붕괴로 겨우 긍정적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인간의 행복은 일상의 생활을 통해서 가능하며 일상생활이야 말로 지고의 영역이자 유일한 성취의 영역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김상우,2000). 일상생활에 대한 재조명은 이러한 근대적 이성에 대한 지적 반성(역사의 변화와 발전은 정치적 혹은 경제적 큰 사건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축적된 일상생활 속에서 배태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선민은 그녀가 처한 일상의 공간에서 새로운 작업의 모티브를 발견하게 된다. <황금투구>작업 후에 결혼과 임신,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다른 일은 전혀 할 수 없는 체, 집에 있는 시간들이 많아지다 보니 삶에 대한 전반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혼제도에 편입되면서 구체적으로 한국적 가부장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미 <황금투구>에서 너무 많은 힘을 들였던 터였고, 9개월 된 첫 아이를 양육하며 자아와 엄마로서의 역할사이에서 힘들었던 그때, 다시 사진을 찍게 되면 손만 뻗으면 다가갈 수 있는 대상, 사회적 공감을 얻어 낼 수 있는 작업, 향후 10년 이상을 지속할 수 있는 주제설정을 하리라 생각했단다. 이는 그녀가 처한 환경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길게 가져갈 수 있는 지치지 않는 작업에 대한 현명한 선택이었다.‘애 키우는 집안은 다들 별반 다를 게 없구나’라는 동병상련으로 시작된 <여자의 집Ⅰ>은 출산 후에 작가가 처했을 현실이 그녀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엄마라면 누구나 겪고 있을 상황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보면 소소한 개인의 일상 같으나 펼쳐놓고 보니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가 그 안에 내재되어 있었고, 출산과 육아문제는‘앙팡잡지’에 흔히 등장하는 분홍색 환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작업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했고 또래의 엄마들은 훌륭한 모델이 되어주었다. 힘들어서 그만 두고 싶을 때‘애가 뱃속에 있을 때 제일 편하다’고 만삭이 된 작가의 등을 떠밀어 준 사람도 있고, 그렇게 작업을 하다 보니 다음 작업으로 이어지면서 발표할 수 있는 장도 생겼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여자의 집Ⅰ> 이후에 한 집안의 주요 행사 중 하나인 제사, 명절, 집안행사까지 확장시키면서 <여자의 집Ⅱ> 에서는 대가족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 위치, 가족의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사진 속 여자들의 공간은 시댁의 안방이거나 부엌이다. 집안의 어른인 아버지는 제일 좋은 자리에 편안하게 앉거나 벽에 기댄 체 텔레비전을 보면서 제사 음식을 미리 맛본다. 아들은 아버지처럼 편히 앉아 있을 수 없으니 방안도 부엌도 아닌 경계에 어정쩡하게 서 있으면서 들어 갈수도 빠질 수도 없는 위치에 있다. 여자는 좁은 부엌에 앉아서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아들 우유 챙기고, 시아버지 음식 장만해서 나르고, 시동생이 주문한 커피를 탄다. 이는 그녀의 사진에서도 드러나 있지만 우리나라 여염집에서 제사상을 준비하는 보통의 풍경이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우리세대의 남자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방안의 소품들, 즉 그 지역을 확연히 알 수 있는 숫자 큰 달력, 빛바랜 문틈, 안방이나 대청마루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걸린 가족사진들, 텔레비전을 덮은 레이스 달린 낡은 보자기 등 실내에서 보여 지는 사물들과의 연관성도 놓지 않는다. 화면 내에 배치된 각 요소들에 의해 일정한 의미작용을 이끌어 내며 관람자로 하여금 스스로 이미지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읽어나가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작품 속 인물들이 이미 자기가 ‘찍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은 그녀가 작업하는 동안(재빨리 필름을 바꾸고 구도를 잡는 동안) 순순히 움직임을 멈추었을 것이고 그녀는 각각의 인물의 제스처와 태도가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개인의 정체성과 관계들을 보여주는지 살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공간과 인물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누가 카메라를 보는지 아니면 피하는지와 같은 요소들을 통해 가족 구성원들의 친밀함이나 거리감을 드러내며 인물들 간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가부장적 사회관에서 여성은 남성의 위치를 확고히 해주고 그들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는 울타리 안의 또 다른 타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유교적인 전통 가치관에 설상가상으로 근대 식민의 트라우마까지 합세해 오랜 타자의 삶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여성에게 자기 목소리를 담아내는 일은 그들이 주체가 된다 하더라도 쉽게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다. 이선민은 총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경험의 핵심을 간파하고 보다 정확하고 명료하게 깨닫기 위해 항상 그녀가 처한 현실에서 나/그가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충분히 묘사하고 있다. 여성들이 겪는 다층적이고 다성적인 경험들, 혹은 여성들의 삶에 존재하는 매우 생생하고 불안한 문제들을 현미경으로 세세히 살피면서 작품 속에서 많은 담론꺼리를 생산해내고 있다. 이는 여성이라는 기표가 갖는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정한 담론 내에 위치하는 다른 기표와의 관계에 의해서 맥락적인 의미를 갖게 한다. 그래서 <여자의 집>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남성은 능동적/이성적인 여성작가의 수동적/자연적인 대상으로 머물 뿐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카메라 앞에 선 작가의 시선과 완성된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시선, 그리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서로에게 던지는 시선을 교차하게 하며 끊임없이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다.

욕망이 일치된 공간, <트윈스(Twins)>

첫 작업 <황금투구>로부터 <여자의 집Ⅰ,Ⅱ>, <도계프로젝트>에서 약간 빗겨나 <트윈스Twins>(2006)에서는 서양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등장하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생활의 모습을 한국의‘분당’이라는 한 지역의 살림 공간 안으로 끌어온다. <트윈스>의 공간은 형형색색의 크고 작은 소품들, 여성지에 흔히 등장하는 거실의 가구,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고가의 아동복, 적절하게 배치된 아이들 방의 인테리어 등 극히 물화된 냄새를 풍기면서 한국사회의 특징 중 하나인 ‘일치(conformity)의 욕구’에 기초한 ‘적어도 남들처럼은 살아야 한다’는 여성/엄마들의 인식과 행위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분당’은 작가가 실제로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중산층의 전형적인 삶의 형태를 보여주는 특수한 지역 중의 하나로 작가가 ‘분당’을 택한 이유이다. 계층이론에서 설명하는 준거집단이론에 의하면 중류층은 인식과 행위를 자신이 속한 중류층을 염두에 둔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중류층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준거집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점점 옅어지면서 대신 텔레비전 드라마(혹은 각종 미디어)에 등장하는 귀족집단들이 준거집단이 되는데 이는 신기하게도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것 혹은 그것들의 의미화가 무엇이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복잡하고 세련된 기제와 그것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은 어떤 힘이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동굴 속의 그림자를 실재로 여기게 하는 미망에 다름없다. 또한 부르주아계급의 문화를 수용하면 부르주아계급에 속하게 된다고 하는 문화적인 헤게모니이고 합의에 의해 은연중에 내면화되는 일상의 또 다른 권력의 형태이다. 이를 카메라 메커니즘과 비유하자면 사진의 재현체계가 우리의 시점을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시키도록, 즉 거울에 비친 정면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도록 훈련시켜온 것(빅터버긴)과 비슷하다. 작가가 이 작업의 타이틀을 ‘트윈스(Twins)’라고 한데는 투사를 통한 동일시, 그리고 내면화를 통해 어느새 실재(real)라고 착각하게 되는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여성/엄마가 받아왔던 억압과 차단, 부정적인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과 욕망이 고스란히 그의 어린 자녀들에게 투사되고 이를 통해 후기산업사회, 소비사회, 욕망이데올로기 등 몇 가지 주요 담론들을 다시 관람객에게 투사한다. 이는 공간의 정확한 색재현과 인물과 카메라와의 일정한 거리, 깊은 심도 등의 테크닉을 통해 작가의 중립적 시각을 보여주면서 감상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트윈스>에서도 주목할 점은 등장인물의 시선처리이다. 이선민의 다른 작업에서처럼 사진 속 인물들이 감상자의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무감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그 시선은 감상자를 끌어당기려는 시선이라기보다 단순히 나르시즘적 주인공으로‘보여지는’대상일 뿐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바라보는’감상자들의 눈빛이 사진 속 인물들의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트윈스>의 인물들은 하나의 무대위에 서 있는 배우들처럼 우리를 관람객의 위치에 놓이게 하고, 우리는 일종의 관음증 환자처럼 그들을 엿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업은 감상자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작업이다. 중산층 집안의 풍경을 천천히 구경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시각적 주체가 되게 하는 점에서 그렇다.

부재와 현존의 공간, <도계프로젝트>

선민의 최근 작업 <도계프로젝트>(2005~2007)에서는 가장 근대적인 공간, 광산촌을 배경으로 여성과 가족에 대한 의미를 심화시키고 있다. 잘 알다시피 우리의 근대는 서구 근대 개념을 그대로 대입해 쓰면 여러 면에서 심각한 폐해를 낳는다. 우리의 근대는 서구 근대의 타자로서 일종의 ‘억압된 근대’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근대화가 100년 단위로 일어났던 네 번의 혁명(종교개혁, 르네상스 운동, 프랑스 대혁명, 산업혁명)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양에서 400년에 걸쳐 이루어 낸 근대화를 단 40년에 해치움으로써 여러 가지의 부작용과 후유증이 따르고 있다. 그런데다가 이 네 가지 혁명의 순서조차 뒤바뀌어 ‘새마을 운동’이라는 우리식(자율과 자립은 뒤로한 채 철저하게 위로부터의 상명하달 식으로 진행되어온)의 산업혁명부터 일어나면서 정신적 변화를 모색하기보다 기술적 차원에서의 근대화에만 급급해왔다.

행정상 삼척시의 서남부, 태백시의 동쪽경계에 자리한 '도계'는 인근의 태백, 정선, 사북, 고한, 철원 등과 함께 60~70년대 탄광산업이 발전했던 곳이다. 5.16 이후 이 땅에 몰아닥친 경제개발정책과 함께 본격적인 탄광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도계는 오늘날과 같은 규모의 탄광촌으로 급성장하게 되었는데, 여름 한 철 피서객들을 실고 달리는 지금의 영동선은 사실 5.16정권에서 배제된 실업자나 부랑자들이 만들어 낸 산업철도였다고 한다. 탄광촌을 달리는 기차는 산과 산을 관통하며 엄청난 속도와 힘을 가진 근대의 표상체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호이다. 이는 사진이 등장하게 된 19세기 중엽, 산업혁명의 원동력인 증기기관차와 철, 석탄으로 부르주아 계급이 거대한 양의 자본축적을 한 힘과 상응한다. 근대적 성찰의 항목으로 선택과 배제를 든다면, 주변부그룹들이 중심부의 논리에 의해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중심부에 의해 규정되어 온 근대성이 ‘실상 남성적인 것’이라는 사실, 결국 남성적인 시선 - 중심부의 시선으로 해석되고 경험되어 온 것이 근대성이라는 것, 그 근대성을 설명하는 방식이 또한 중심부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근대성의 중심에 카메라가 있다. 세계를 물질화시키고 고정화시키고 체계화하려는 근대정신의 근본을 이루는 특이한 기술이자 우리 시각의 기층을 형성하는 원근법적 인식의 귀착지가 카메라 옵스쿠라요, ‘도계’는 그 자체로 거대하게 현존하는 카메라 옵스쿠라가 된다. 이선민이 도계를 선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과정과 그 식민화에 반응했던 다양한 방식들, 군부독재에 의한 급격한 산업화와 개발 등 현재‘한국적’상황을 가로지르고 있는 역사들이 녹아있는 곳이 바로 광산촌이기 때문이다.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하기 위해 국가가 수행해야하는 억압을‘근대화’라는 민족의 목표로 정당화했다면 그 대표적인 산물이 에너지의 산실인 광산이고, 그것을 운송할 수 있는 이동시설로서의 기차 및 전 국토에 시원스럽게 뚫린 고속도로가 될 것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중심의 가치로 주변을 배제시키는 것, 즉 핵심가치를 만드는 권력으로서 찍히는 대상에 대한 폭력성을 전제로 한다면 도계라는 지역은 가장 사진적인 공간이 된다.

이선민이 10년 만에 다시 찾은 도계는 ‘시간이 비껴간 듯 변치 않은 풍경’으로 그녀의 시선을 붙들어놓는다. 인근의 태백, 정선일대가 화려한 관광지로 탈바꿈되는 동안 도계는 경동광업소를 중심으로 아직도 주민들의 대부분이 광산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한 공간 안에, 한 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 이곳이 왠지 사연도 많을 것이라는 그녀의 예감처럼 도계는 ‘무채색의 거리와 시린 풍경’속에서 유령처럼 긴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이선민은 이렇듯 근대적인 공간인 도계에서, 일상의 시공간에서 보여 지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끌어내고 있다. 40년을 동거 동락한 노부부의 포근한 방안 풍경에서부터, 성묘를 하기 위해 음식바구니를 들고 산에 오르는 가족과 사택 옆 기찻길에서 불편한 몸을 서로 잡아주며 카메라 앞에 선 부부의 이야기까지 도계의 다양한 인물과 공간을 촘촘히 읽어내고 있다. 특히 이전의 작업에서처럼‘울타리 안’의 여성의 위치를 화면 안에서 치밀하게 구성해 내고 있는데, 오랜 시련의 삶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에게는 화면의 정중앙을 내어주고, 광부남편과 광부아들을 둔 어머니에게는 동쪽 하늘을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자리를 준다. 그리고 집안의 궂은일을 도맡아 해온 큰며느리는 자기 목소리를 담아내는 주체로서 정면을 응시하게 한다. 그녀의 시선은 이처럼 사진 속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최소한의 연출을 통해 충분히 묘사해 내고 있다.

특히 <도계프로젝트>에서 주의 깊게 볼 점은 한 화면 안에서 자율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빛들의 내러티브’이다. 이선민의‘빛’은 공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확산광(자연광)과 카메라 뒤에 위치한 강한 인공광이 만나 화면 안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인물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타고 다닌다. 뿐만 아니라 이 빛들은 시간성과 공간성이 잘 드러나도록 인물과 배경의 구석구석을 섬세하게 발견해내고 의미를 확장시켜 나간다. 화면의 가장 밝은 곳이나 전면에 어김없이 위치한 한 집안의 가장을 중심으로, 죽음의 공간인 무덤주변에 점점 퍼져나가고 멀리 사라져가는 후손들의 모습 속에서 흘러가버린 시간과 살아 있는 세상을 자르고 화석화하는, 죽음을 내포한‘사진찍기의 성찰’을 보여준다. 또한 죽은 남편의 묘지 앞에 지팡이를 짚고 당당하게 중심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을 통해 사진 찍는 행위의 본질인 부재와 현존의 실상을 드러내며 가족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이렇듯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명절에 모인 사람들은 이선민의 사진 속에서 서로 인정하면서도 살짝 비틀고, 때로 낯설고 이질적으로 보이면서도 따뜻한 향수가 드러나는 다양한 포즈들을 통해 새롭게 관계를 형성한다.

마샬버만이 말한 “위험스럽게 깊이를 결여하고 있는 일종의 무대 장치”와 같은 근대적 공간 도계. 이곳에서 ‘부슬부슬 안개비 내리는 쌀쌀한 공기를 견디며 선탄장 앞에 카메라와 조명을 설치하’는 작가의 지난했을 작업 과정이 그려진다. 한 뜸 한 뜸 바느질을 하듯 거의 수작업에 가까운 대형카메라로 이전보다 더 과감하고 역동적인 프레이밍을 구사하면서 그녀가 약속한‘10년 동안의 작업’에 화룡점정을 하듯 명확한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스스로 중심잡기

‘가족이란 무엇일까’로 시작된 그녀의 작업이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가정을 돌아보게 하고 공감하게 하는 것은 그녀 작품 안에 면면히 흐르는 일상의 깊은 성찰 때문이다. 이렇듯 이선민의 작품 속엔 작가가 보아온 또는 현재 보고 있는, 그리고 살고 있는 그 생활 속에서 작품을 끌어내는 놀라운 건강미가 넘친다.

내게 이선민은 어깨 넓이로 다리를 벌리고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내다보는 당당한 뒷모습으로 기억된다. 그녀의 뒷모습처럼 그녀 사진이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자신의 세계를 자신만의 사진문법으로 보고 말하며, 자기만의 사진언어로 사유하라는 것이다. 그간 우리는 남의 시각을 빌려다가 우리의 세계를 인식하려고 안간힘을 쏟으며 많은 시행착오를 저질렀지 않았는가. 그녀는 이제 개발과 탐색을 시도하면서 따뜻한 가족의 이야기가 있는 추수가 이미 끝난 허허벌판으로 나아간다. 제한된 ‘가부장적 가족울타리 안에서의 여성’에서 벗어나 좀 더 다양한 한국의 가족문화와 그들의 삶의 터전, 생활문화에 관심을 갖고 표현하려고 한다. 그녀가 전제하고 있는 바탕은 튼튼하고 확실해서 그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삶도 평안하고 안전할 것 같다. 우리말의 ‘살림살이’에는 살리는, 다시 말해 죽지 않도록 감싸주고 보살피는 삶의 방식을 가장 중요한 생활자세로 본 선인들의 삶의 철학이 배여 있다고 한다. 이선민이야 말로 ‘사진으로 살림’하는 에코페미니스트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진으로 살림’하면서 ‘사진으로 성찰’하고 지속가능한 소통의 장을 만들어가는 것, 여기에 이선민의 비전과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