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MIN LEE

울타리, 혹은 프레임의 안과 밖에서 사진으로 살림하기 - 이선민의 사진

최연하

작가 이선민은 참 지혜로운 여자다. 그녀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담장 밖의 세계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하여 지치지 않고 길게 작업할 터전을 마련한다. <여자의 집>으로부터 시작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도계프로젝트>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주제 찾기’가 전형적인 한국적 가족상황에서 여성적인 의식과 경험에서 나온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이 후속 작업으로 책갈피 넘기듯 정교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일련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계프로젝트>의 마무리시점에 만난 그녀는 작업을 마친 홀가분함과 함께 벌써부터 다음 작업을 생각하는 조심스런 포부가 엿보였다. 이미 여러 매체와 평론가가 주목하고 있던 터라 그녀에 대해 다양하게 습득된 정보로 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자유롭지 못하다면 최소한 내가 바라보는 그녀와 그녀의 작품에 대해 맘껏 고민하고 싶다는 바람이 일었다. 이선민의 작품들 속에 푹 빠져 지낸 며칠 동안은 위대한 것과 사소한 것, 권력과 권력의 바깥에 있는 것 혹은 프레임의 안과 밖이 무엇인지 내게 묻는 시간들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작품을 통해 터득해가듯 가부장적인 상황 속에서도 생명을 보듬어 조화롭게 하는 주체로 우뚝 서 ‘사진으로 살림하는’재미를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선민은 초기작품인 <황금투구>에서 권력의 상징적인 인물인 카이사르(예명 시저, Caesar, Gaius Julius, BC 100.7.12~BC 44.3.15)를 캐스팅한다. 카이사르는 서양사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사람 중의 하나로 로마의 권력을 한 몸에 집중시켜 비극적 종말을 맞은 인물이었다. 그녀에겐 경상도 출신의 자수성가한 다분히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가 카이사르로 자리한다. 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들어야 식사를 시작할 수 있고, 아버지가 귀가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하니 짐작할 만하다. 게다가 그녀의 성장기에 대통령 저격사건과 군부의 쿠데타, 너무도 혼란스러운 80년대가 있었다. 그녀는 그 기억들을 첫 작업의 소재로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이 작업에서 놀라운 것은 인물섭외에서, 배경제작, 소품준비, 촬영까지 꼼꼼히 진행하면서 쏟아냈을 그녀의 에너지다. 실제 연극을 하는 남성배우를 적극적으로 캐스팅하고, 직접 무대를 제작하고, 누가 봐도 명료한 콘셉트아래 꼬박 2년의 시간과 공을 들인, 지금 봐도 흥미롭고 재미있는 작업을 두고‘그 당시 나의 욕심과 한계가 그대로 드러난 쑥스러운 작업이다. 세상의 모든 권력이 허무하다는 생각에 시작하였지만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작업은 권위적이었던 아버지와 나름의 화해를 시도한 성인식 같은 작업’이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이 초기 작업을 통해 향후 그녀는 상황에 맞는 탁월한 인물의 캐스팅 능력과 공간구성, 공간과 인물의 배치가 마치 세트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린 그녀만의 미장센을 만들어낸다.

<황금투구>작업 후에 결혼과 임신,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다른 일은 전혀 할 수 없는 체, 집에 있는 시간들이 많아지다 보니 삶에 대한 전반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혼제도에 편입되면서 구체적으로 한국적 가부장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미 <황금투구>에서 너무 많은 힘을 들였던 터였고, 9개월 된 첫 아이를 양육하며 자아와 엄마로서의 역할사이에서 힘들었던 그때, 다시 사진을 찍게 되면 손만 뻗으면 다가갈 수 있는 대상, 사회적 공감을 얻어 낼 수 있는 작업, 향후 10년 이상을 지속할 수 있는 주제설정을 하리라 생각했단다. 이는 그녀가 처한 환경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길게 가져갈 수 있는 지치지 않는 작업에 대한 현명한 선택이었다. ‘애 키우는 집안은 다들 별반 다를 게 없구나’라는 동병상련으로 시작된 <여자의 집Ⅰ>은 출산 후에 작가가 처했을 현실과 가족제도가 그녀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엄마라면 누구나 겪고 있을 상황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보면 소소한 개인의 일상 같으나 펼쳐놓고 보니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가 그 안에 내포되어 있었고, 출산과 육아문제는‘앙팡잡지’에 흔히 등장하는 분홍색 환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작업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했고 또래의 엄마들은 훌륭한 모델이 되어주었다. 힘들어서 그만 두고 싶을 때‘애가 뱃속에 있을 때 제일 편하다’고 만삭이 된 작가의 등을 떠밀어 준 사람도 있고, 그렇게 작업을 하다 보니 다음 작업으로 이어지면서 발표할 수 있는 장도 생겼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여자의 집Ⅰ> 이후에 한 집안의 주요 행사 중 하나인 제사, 명절, 집안행사까지 확장시키면서 <여자의 집Ⅱ> 에서는 대가족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 위치, 가족의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사진 속 여자들의 공간은 시댁의 안방이거나 부엌이다. 집안의 어른인 아버지는 제일 좋은 자리에 편안하게 앉거나 벽에 기댄 체 텔레비전을 보면서 제사 음식을 미리 맛본다. 아들은 아버지처럼 편히 앉아 있을 수 없으니 방안도 부엌도 아닌 경계에 어정쩡하게 서 있으면서 들어 갈수도 빠질 수도 없는 위치에 있다. 여자는 좁은 부엌에 앉아서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아들 우유 챙기고, 시아버지 음식 장만해서 나르고, 시동생이 주문한 커피를 탄다. 이는 그녀의 사진에서도 드러나 있지만 우리나라 여염집에서 제사상을 준비하는 보통의 풍경이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우리세대의 남자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방안의 소품들, 즉 그 지역을 확연히 알 수 있는 숫자 큰 달력, 빛바랜 문틈, 안방이나 대청마루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걸린 가족사진들, 텔레비전을 덮은 레이스 달린 낡은 보자기 등 실내에서 보여 지는 사물과의 연관성도 놓치지 않는다.

가부장적 사회관에서 여성은 남성의 위치를 확고히 해주고 그들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는 울타리 안의 또 다른 타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유교적인 전통 가치관에 설상가상으로 근대 식민의 트라우마까지 합세해 오랜 타자의 삶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여성에게 자기 목소리를 담아내는 일은 그들이 주체가 된다 하더라도 쉽게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다. 이선민은 총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경험의 핵심을 간파하고 보다 정확하고 명료하게 깨닫기 위해 항상 그녀가 처한 현실에서 나/그가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충분히 묘사하고 있다. 여성들이 겪는 다층적이고 다성적인 경험들, 혹은 여성들의 삶에 존재하는 매우 생생하고 불안한 문제들을 현미경으로 세세히 살피면서 작품 속에서 많은 담론꺼리를 생산해내고 있다. 이는 여성이라는 기표가 갖는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정한 담론 내에 위치하는 다른 기표와의 관계에 의해서 맥락적인 의미를 갖게 한다. 그래서 <여자의 집>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남성은 능동적/이성적인 여성작가의 수동적/자연적인 대상으로 머물 뿐이다.

첫 작업 <황금투구>로부터 <여자의 집Ⅰ, Ⅱ>, <도계프로젝트>에서 약간 빗겨나 트윈스Twins의 작업에서는 서양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등장하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생활의 모습을 한국의 ‘분당’이라는 한 지역의 살림 공간 안으로 끌어와 자녀교육의 허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형형색색의 크고 작은 소품들, 여성지에 흔히 등장하는 거실의 가구,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고가의 아동복, 적절하게 배치된 아이들 방의 인테리어 등 극히 물화된 냄새를 풍기고 있다. 트윈스Twins에서는 함축적이고 단순하면서도 평화롭고 따스해 보이는 여성/엄마들의 모종의 따뜻한 투사가 들어있다. 여성/엄마가 받아왔던 억압과 차단, 부정적인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과 욕망이 고스란히 그의 어린 자녀들에게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후기산업사회, 소비사회, 욕망이데올로기 등 몇 가지 주요 담론들이 이 작업에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트윈스Twins에서 주목할 점은 등장인물의 시선처리이다. 이선민의 다른 작업에서처럼 사진 속 인물들이 감상자의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무감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그 시선은 감상자를 끌어당기려는 시선이라기보다 단순히 나르시즘적 주인공으로‘보여지는’대상일 뿐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바라보는’감상자들의 눈빛이 사진 속 인물들의 시선을 적극적으로 끌어당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업은 감상자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작업이다. 중산층 집안의 풍경을 천천히 구경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시각적 주체가 되게 하는 점에서 그렇다.

그녀가 촬영지역으로 선택한‘도계’는 그녀의 말대로‘산자락이 좋고 훌륭한 풍광’만을 말하지 않는다. 태백 및 정선일대가 몇 년 사이에 화려하게 탈바꿈한 곳이라면 아직도 경동광업소, 도계광업소등 탄광이 남아있어 광산업이 생업인 도계는 근대화 추진의 축소판 같은 곳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과정과 그 식민화에 반응했던 다양한 방식들, 군부독재에 의한 급격한 산업화와 개발 등 현재‘한국적’상황을 가로지르고 있는 역사들이 녹아있는 곳이 광산촌이다.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하기 위해 국가가 수행해야하는 억압을‘근대화’라는 민족의 목표로 정당화했다면 그 대표적인 산물이 에너지의 산실인 광산이고, 그것을 운송할 수 있는 이동시설로서의 기차 및 전 국토에 시원스럽게 뚫린 고속도로가 될 것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중심의 가치로 주변을 배제시키는 것, 즉 핵심가치를 만드는 권력으로서 찍히는 대상에 대한 폭력성을 전제로 한다면 도계라는 지역은 가장 사진적인 공간인 것이다. 여기에 이선민이 도계를 택한 이유가 있다. 이선민은 한국의 가족의 모습을 도계의 드넓은 대자연 안에서 다시 해석해 보인 것이다. 작가의 시선은 시간성과 공간성이 잘 드러나도록 인물과 배경의 구석구석을 섬세하게 발견하고 드러내 보이면서 의미를 확장시켜나간다. 이제껏 광산촌을 찾게 되는 대부분의 사진가들이 생산해내는 스테레오타입의 포트레이트에서 벗어나 작업현장이 잘 드러난 환경 포트레이트나 실제 거주하고 있는 주거공간에서 가족들하고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찬찬이 담아내면서‘여자의 집 안’이 아니라‘울타리 밖’에서 합리적이고 다분히 이성적 기계인 카메라 앞에 여자들을 당당히 서있게 한다.

스스로 중심잡기

내게 이선민은 어깨 넓이로 다리를 벌리고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내다보는 당당한 뒷모습으로 기억된다. 그녀의 뒷모습처럼 그녀 사진이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자신의 세계를 자신만의 사진문법으로 보고 말하며, 그녀만의 이론을 정립하고, 자기만의 사진언어로 사유하라는 것이다. 그간 우리는 남의 시각을 빌려다가 우리의 세계를 인식하려고 안간힘을 쏟으며 많은 시행착오를 저질렀지 않았는가.

그녀는 이제 개발과 탐색을 시도하면서 따뜻한 가족의 이야기가 있는 추수가 이미 끝난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으로 나아간다. 제한된 ‘가부장적 가족울타리 안에서의 여성’에서 벗어나 좀 더 다양한 한국의 가족문화와 그들의 삶의 터전, 생활문화에 관심을 갖고 표현하려고 한다. 그녀가 전제하고 있는 바탕은 튼튼하고 확실해서 그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삶도 평안하고 안전할 것 같다. 우리말의 ‘살림살이’에는 살리는, 다시 말해 죽지 않도록 감싸주고 보살피는 삶의 방식을 가장 중요한 생활자세로 본 선인들의 삶의 철학이 배여 있다고 한다. 작가 이선민이야 말로 ‘사진으로 살림’하는 에코페미니스트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