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MIN LEE

부재와 현존의 공간

최연하 (환경재단큐레이터, 전시기획자)

이선민은 프레임의 안과 밖에서 건강하고 투명하게 사유하는 작가다. 또한 프레임의 안에 있으면서 프레임 밖의 세계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하여 지치지 않고 길게 작업하는 현명한 사진가다. 그녀의 초기작업 <황금투구>로부터 <여자의 집Ⅰ,Ⅱ>, <Twins>로 이어진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도계 프로젝트>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이선민의‘주제 찾기’가 전형적인 한국적 가족상황에서 여성적인 의식과 경험에서 나온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이 후속 작업으로 책갈피 넘기듯 정교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일련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자들의 소소한 일상의 풍경이 담긴 <여자의 집Ⅰ>으로부터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를 보여주는 <여자의 집Ⅱ>까지, 이선민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주제를 통해 권력과 권력의 바깥에 있는 것 혹은 프레임의 안과 밖이 무엇인지를 감상자로 하여금 스스로 묻게 한다. 그녀는 이처럼 대가족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위치, 가족의 의미와 함께 여성들이 겪는 다층적이고 다성적인 경험들, 혹은 여성들의 삶에 존재하는 매우 생생하고 불안한 문제들을 파인더로 세세히 살피면서 많은 담론꺼리를 만들어왔다. 이선민의 최근 작업 <도계 프로젝트>에서는 가장 근대적인 공간, 광산촌을 배경으로 여성과 가족에 대한 의미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전 작업에 비해 엄격한 형식적 과정(카메라 포맷, 라이팅, 프레이밍, 인물과 공간의 연속과 불연속의 변증법)을 거치며 공간과 시간을 긴장감 있게 재구성하면서 독특한 사진문법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선민이 10년 만에 다시 찾은 도계는 ‘시간이 비껴간 듯 변치 않은 풍경’으로 그녀의 시선을 붙들어놓는다. 인근의 태백, 정선일대가 화려한 관광지로 탈바꿈되는 동안 도계는 경동광업소를 중심으로 아직도 주민들의 대부분이 광산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한 공간 안에, 한 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 이곳이 왠지 사연도 많을 것이라는 그녀의 예감처럼 도계는 ‘무채색의 거리와 시린 풍경’속에 근대 한국적 상황을 가로지르는 역사들이 녹아있는, 근대화 추진의 축소판 같은 곳이자 지극히 사진적인 공간이 된다. 이선민은 이렇듯 근대적인 공간인 도계에서, 일상의 시공간에서 보여 지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끌어내고 있다. 40년을 동거 동락한 노부부의 포근한 방안 풍경에서부터, 성묘를 하기 위해 음식바구니를 들고 산에 오르는 가족과 사택 옆 기찻길에서 불편한 몸을 서로 잡아주며 카메라 앞에 선 부부의 이야기까지 도계의 다양한 인물과 공간을 촘촘히 읽어내고 있다. 특히 이전의 작업에서처럼‘울타리 안’의 여성의 위치를 화면 안에서 치밀하게 구성해 내고 있는데, 오랜 타자의 삶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에게는 화면의 정중앙을 내어주고, 광부남편과 광부아들을 둔 어머니에게는 동쪽 하늘을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자리를 준다. 그리고 집안의 궂은일을 도맡아 해온 큰며느리는 자기 목소리를 담아내는 주체로서 정면을 응시하게 한다. 그녀의 시선은 이처럼 사진 속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최소한의 연출을 통해 충분히 묘사해 내고 있다.

특히 <도계 프로젝트>에서 주의 깊게 볼 점은 한 화면 안에서 자율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빛들의 내러티브’이다. 이선민의‘빛’은 공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확산광(자연광)과 카메라 뒤에 위치한 강한 인공광이 만나 화면 안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인물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타고 다닌다. 뿐만 아니라 이 빛들은 시간성과 공간성이 잘 드러나도록 인물과 배경의 구석구석을 섬세하게 발견해내고 의미를 확장시켜 나간다. 화면의 가장 밝은 곳이나 전면에 어김없이 위치한 한 집안의 가장을 중심으로, 죽음의 공간인 무덤주변에 점점 퍼져나가고 멀리 사라져가는 후손들의 모습 속에서 흘러가버린 시간과 살아 있는 세상을 자르고 화석화하는, 죽음을 내포한‘사진찍기의 성찰’을 보여준다. 또한 죽은 남편의 묘지 앞에 지팡이를 짚고 당당하게 중심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을 통해 사진 찍는 행위의 본질인 부재와 현존의 실상을 드러내며 가족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이렇듯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명절에 모인 사람들은 이선민의 사진 속에서 서로 인정하면서도 살짝 비틀고, 때로 낯설고 이질적으로 보이면서도 따뜻한 향수가 드러나는 다양한 포즈들을 통해 새롭게 관계를 형성한다.

마샬버만이 말한 “위험스럽게 깊이를 결여하고 있는 일종의 무대 장치”와 같은 근대적 공간 도계. 이곳에서 ‘부슬부슬 안개비 내리는 쌀쌀한 공기를 견디며 선탄장 앞에 카메라와 조명을 설치하’는 작가의 지난했을 작업 과정이 그려진다. 한 뜸 한 뜸 바느질을 하듯 거의 수작업에 가까운 대형카메라로 촬영을 진행하면서 스스로 약속한 ‘10년 동안의 작업’을 기어코 이루어낸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가족이란 무엇일까’로 시작된 그녀의 작업이 <도계 프로젝트>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가정을 돌아보게 하고 공감하게 하는 것은 그녀 작품 안에 면면히 흐르는 일상의 깊은 성찰 때문이다. 이렇듯 이선민의 작품 속엔 작가가 보아온 또는 현재 보고 있는, 그리고 살고 있는 그 생활 속에서 작품을 끌어내는 놀라운 건강미가 넘친다. ‘사진으로 살림’하면서 ‘사진으로 성찰’하고 지속가능한 소통의 장을 만들어가는 것, 여기에 이선민의 비전과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