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MIN LEE

여성의 주체적 삶의 가능성 - 이선민의 문제의식

박평종

여성의 지위

여성의 주체적 삶과 자유의 문제는 부계사회가 풀어야 할 가장 오래된 숙제 중의 하나로 알려진지 오래다. 인류 문명사 속에서 제기되었던 온갖 유형의 불평등과 억압의 구조들은 차츰 해소되는 과정을 밟아왔지만 여성의 삶과 관계된 문제는 다른 종류의 그것에 비해 본질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이는 여성의 주체적 삶을 가로막는 다양한 요소들이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와 긴밀히 연계되어 작동해 왔기 때문이다. 부계사회라는 구조는 문명사에서 가장 오래된 구조인 것이다. 현대 여성들이 자신을 집단의 부속품이 아니라 하나의 주체로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보편교육의 확장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이지만 새로운 인식이 새로운 삶을 온전히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삶 또한 사회구조와 얽혀 흘러가기 때문이다. 여성의 주체적 삶에 대한 문제는 이미 근대화시기부터 제기되어 자유연애나 여성의 자아실현, 새로운 사회질서 속에서의 여성의 역할 등 다양한 형태의 파생적인 질문들을 던져주기도 했으나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여성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삶의 질도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본질적인 변화는 없는 것이다. 작은 변화가 쌓여 언젠가는 결정적인 변화를 낳는 것이 모든 변화의 법칙이라고들 하는데 아직까지 현대 여성들의 삶이 그런 변화를 맞이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관건인가.

문제는 여성이 온전한 주체로 서기 위한 조건들을 찾아내는 데 있는 것 같다. 주체란 말 그대로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임을 뜻한다. 판단과 행위를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고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는 자, 그것이 주체에 대한 가장 간단한 정의이다. 상식에 따라 행동하고 기본적인 규범과 양식을 아는 자는 따라서 누구나 주체로서의 자격을 지닌다. 하지만 부계사회의 질서 속에서 여성은 주체의 자격을 박탈당한 채로 살아왔다. 그것은 원시공동체 사회가 요구하는 가혹한 생존논리에서 생겨나 점차 확장되어 오다가 결국 구조로 자리 잡은 질서이다. 여성은 주체가 아니라 주체를 보좌하는 존재, 혹은 주체에 예속된 존재로 살아왔다. 그러한 삶이 때로는 편할 때도 있다. 강력한 권력을 지닌 남성이나 막대한 부를 소유한 남성의 곁에서 주체임을 잊거나 속이며 사는 것을 택하는 여성들도 있는 것이다. 이를 탓할 까닭은 없다. 그 또한 주체로서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은 주체의 몫이지 타인의 것은 될 수 없다. 결정은 주체로서 하되 결정 이후의 삶은 주체이기를 그만둔다는 것은 크나큰 모순이자 자기기만이다. 따라서 여성의 주체적 삶을 위한 조건의 확보는 두 가지 갈래로 나누어 해결해야 할 것 같다.

첫째는 역시 사회구조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 부계사회라 부르는 문명사 속의 큰 구조가 있고 한국사회의 특수성과 맞물린 가부장적 질서가 있다. 그것이 표면적으로는 여성의 주체적 삶을 가로막는 외적 장애물이다. 이는 가사노동이나 육아문제와 관련된 물리적 불평등에서부터 시작하여 여성의 행동이나 말투, 사회활동 등과 관계된 온갖 종류의 부당한 인식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걸쳐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한 사회적 관심과 개선에 대한 의지가 공감을 얻기 시작한지도 상당히 오래되어 많은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변화는 아직도 요원한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 점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방법을 찾아나가야 한다. 둘째는 여성 스스로의 자기인식에 대한 문제이다. 주체적 삶이 반드시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행복은 만족감과 결부되어 있어 때로는 주체적 삶을 살지 않더라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가혹한 빈곤에 허덕이며 다수의 부양가족을 거느린 주체적 가부장의 괴로움은 선량한 주인을 만나 자신의 처지에 만족해하며 살아가는 노예의 행복감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따라서 주체적 삶을 위해서는 때로 크나큰 희생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인형의 집’을 벗어나는 노라의 선택은 근사하고 용기 있어 보이지만 대다수의 여성들은 안락한 새장 속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러한 바람이 비록 여성에게 주체적 지위를 배당하기를 거부하는 남성중심의 왜곡된 교육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여성들의 자기 인식에 관한 문제 못지않게 주체적 삶을 위한 경제적 자립의 조건 또한 중요하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경제적 자립에 대한 중압감을 견뎌내지 못하여 주체적 삶을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한 이상 말이다. 하지만 자립의 조건이 여성들에게 불평등하게 주어져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따라서 여성의 문제는 제도의 개선과 맞물려 있다는 말은 공허한 원칙이 아니라 진정한 변화를 얻어내기 위한 실천원리에 가깝다.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여성의 지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 온 이선민의 작업은 이러한 두 가지 층위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스스로 가부장제 가족의 구성원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작가는 여성의 문제를 관념적인 이론이나 논리보다 삶의 경험 속에서 끌어내어 구체적으로 형상화시켜낸다. 여성의 주체적 삶이라는 문제는 가장 가까운 일상의 구석구석에서 제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부정적 질서 속에서 살아 온 남성들은 그 문제를 잘 알지 못한다.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편교육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보통의 인간은 불평등과 억압을 견뎌내지 못한다. 피해자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그래서 억압을 지워나가려는 자세는 되어 있으나 그것이 있음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알려줄 필요가 있다. 이는 단지 억압의 기제를 치유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선량하지만 무지한 남성들이 억압의 공모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부장제의 질서가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되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집단노동이 요구되는 농경 본위의 사회에서는 대가족제가 생산성의 측면에서 유리했고 그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부장제는 반드시 필요한 구조이기도 했다. 다만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를 제도와 관습이 따라잡지 못하는 데서 야기된 문제들이 가부장제의 해악으로 남았을 따름이다. 구조가 변한 만큼 관습도 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다. 한편 핵가족 단위의 생활방식이 보편화된 현재에도 여성들의 역할과 지위는 그 생활방식에 부합하는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 또한 구조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는 둔한 인식과 관습의 문제에 걸려 있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또한 생활과 인식이 별개인 셈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시각이 각각 <여자의 집 Ⅰ, Ⅱ>, <Twins>, <도계 프로젝트>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핵가족 속의 여성

<여자의 집 Ⅰ> 연작은 핵가족 단위의 가족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일상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의 결과물이다. 가정주부만이 여성은 아니지만 여성의 주체적 삶이 끊임없이 위협받고 허약한 토대 위에서 작동하는 모습은 그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작가가 주부의 일상에 주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회활동을 하는 미혼여성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더라도 주체적 삶을 살 수 있다. 불평등의 구조는 여성들만이 아니라 주체적 삶을 사는 남성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까닭에 미혼여성들에게서 주체적 삶과 자유는 기혼여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가정주부의 삶은 이와 크게 다르다. 그녀들의 삶은 우선 가족을 구성하는 또 다른 주체들에 대한 보조자의 역할에 머물러 있다. 남편과 아이를 위한 삶, 그것이 주부의 삶이다.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매우 아름답고 때로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길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하는 숙명이라고 여길 때 문제가 발생한다. 게다가 어째서 그 숙명이란 것이 여자에게만 주어져 있단 말인가. 가족은 최소 단위의 공동체 사회다. 공동체가 제대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규범이 필요하고 구성원 모두가 그 규범을 따라야 한다. 일반적인 사회 공동체와 달리 가족 공동체의 규범은 헐겁고 느슨하며 구성원 개인의 역할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나 경계가 없다. 그런 것이 있다면 가족은 차가운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일반 공동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상대에게 노동을 전가해도 별 탈이 없기 때문이다. 핵가족 단위의 가족 공동체에서 개인들은 과중한 임무를 떠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남편과 아내 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가족 단위의 가족 공동체에서는 한 사람이 노동을 게을리 하더라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구성원의 수가 많아 타인의 역할을 분담할 수 있는 덕분이다. 소수로 구성된 핵가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절대노동의 양은 정해져 있으나 그 노동의 대부분은 주부의 몫으로 남는다. 그것이 대가족공동체가 물려준 유산이다. 그렇다면 남편은 어떤 존재인가. 그 역시 가족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열심히 노동하는 자이다. 하지만 그의 노동은 대부분 밖에서 이루어져 아내는 그의 노동의 양과 질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미루어 짐작할 뿐인 아내의 눈에 남편의 노동은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밖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머지는 그저 상상과 믿음에 의지할 뿐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자신의 노동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집에서는 쉬고 싶은 것이다. 아내는 아내대로 가정 내에서의 노동이 과중하다고 여기며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노동을 인정받기를 원한다. 가혹한 생존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의 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노동을 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가정으로 돌아온 남편의 눈에 아내의 노동은 놀면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는 한가한 소일거리쯤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가정에서만큼은 일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내의 노동 역시 그에 못지않게 버겁다는 사실은 그는 알지 못한다. 해보지 않은데다가 그렇게 배워온 탓이다. 더욱이 가족 공동체의 규범을 알지 못하는 아이가 있을 때 노동의 중량감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는 사실을 그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남편은 여자의 집에서 그저 쉬는 사람이다. 그에게 집은 오로지 휴식의 공간이다. 남편이 노동할 때 아내도 집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그는 종종 망각한다. 주부는 집에서조차도 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녀에겐 집이 곧 일터이기 때문이다. 일터와 쉼터는 물리적 공간이 달라야 하지만 그녀에겐 쉼터가 따로 없다. 그래서 그녀는 온종일 일만 한다. 남편이 일할 때도 일하고 남편이 쉴 때도 일하는 그녀, 빨래를 개는 엄마를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바라보며 놀아달라고 아양을 부리지만(사진1) 온종일 일에 지친 그녀는 TV를 켜놓은 채 그것을 보지도 못한 채 응석을 받아주어야 한다. 빨래를 개면서 동시에 아이와 놀아주기까지 해야 하는 엄마는 일과 휴식과 놀이를 동시에 할 줄 알아야 하는 전천후 일꾼이다. 하지만 그녀도 사람인지라 피곤에 지쳐 한낮에도 세상모르고 단잠에 빠져 든다. 갓난아이가 자야만 잘 수 있는 여자와 엄마가 자면 자기도 자야 하는 또 다른 아이의 모습(사진2)은 아이 키우는 일이 얼마나 고된 노동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노동이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 본래 고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동체의 구성원이 나누어 맡아야 할 짐이다. 현대사회에서의 가사노동이 점차 분담되고 있는 추세이지만 그 성격은 여전히 여성의 주체적 삶을 보장하고 있지 못하다. 여성의 노동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대개 남편의 선량함에 호소하거나 투정 섞인 강요를 남발해야 한다. 그래도 요지부동인 경우가 태반이니 그 속에서 주체적 삶을 살기란 어렵다. 가족제도가 바뀌고 교육수준도 높아지고 여성의 지위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고 가족을 위해 사는 여성의 삶은 그대로인 것이다.

대가족제도의 유산

가족 단위가 현대사회의 보편적인 가족형태로 자리 잡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대가족 단위의 규범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대가족 공동체의 규범 중에서도 본받고 계승해야 할 좋은 측면들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핵가족 단위의 삶과는 맞지 않는 규범들 또한 그에 못지않게 많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은 때로 가족공동체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여자의 집 Ⅱ> 연작에서 작가가 주목하는 것이 이러한 부조화의 문제이다. 대가족공동체의 규범이 개입하는 경우는 대개 명절이나 제사, 의례, 각종 가족행사 등 뿔뿔이 흩어져 사는 가족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소에는 아내를 존중하고 노동을 분담하다가도 가족 친척들만 모이면 근엄한 가부장으로 돌변하는 것이 남편들의 허위의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대가족 공동체의 질서가 강요하는 탓이 크다. 오랜 질서를 깨뜨리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그 질서라는 것이 혈연으로 묶인 집단의 것일 때는 더욱 그렇다. 그 점은 여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가정에서는 여성의 권리를 강조하고 노동의 분담을 떳떳하게 요구하다가도 시댁만 가면 한없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여성들, 그녀들 또한 혈연 공동체의 오랜 질서에 반기를 들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눈치 채고 권위적인 가부장제의 질서를 강요하지 않는 너그러운 집안이라 하더라도 그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제도의 유산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제도를 만드는 것은 사실이나 사람의 생각은 역으로 제도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대가족제의 유산인 제도들은 대가족제적 질서를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년에 몇 차례씩 벌어지는 행사의 형태로만 남아있는 그 제도는 핵가족제의 질서에 익숙한 여성들에게는 버거운 짐이다. 하루 이틀 참아버리면 그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 개입하는 희생의 구조는 참아낼 것이 아니다. 제도란 시대에 맞게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변화는 이미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영숙의 집-추석풍경>은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 중의 하나인 추석에 온 가족이 모여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에서 가족의 구성원 중의 하나인 여성, 요컨대 이 가정의 며느리는 부재한다.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부재는 일종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중산층 이상의 가정임을 추정할 수 있는 집안 풍경으로 보아 이 가족의 가부장은 너그럽고 인자한 시아버지일 것이고 그녀의 남편 또한 선량한 남자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휴식시간에도 일을 해야 하는 며느리의 부재는 모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한편 가부장제의 질서가 엄격히 살아있는 가정에서 며느리의 존재는 여전히 위축되어 있다. <이순자의 집-제사풍경>(사진4)에 그 점이 잘 나타나 있다. 병풍까지 치고 향 피워 올리는 제사는 현대사회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추세이지만 엄격하게 형식을 갖추어 지내는 제사는 아직까지도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관습으로 남아있다. 남자들만이 가문의 일원으로 조상에게 절 올릴 수 있는 자격을 갖는 오랜 관습 속에서 여성은 그저 구경꾼일 따름이다. 마루의 문창살 위쪽에 붙은 자손들의 백일 및 돌 사진은 가문의 존속을 염원하는 상징들이다. 그 아이들이 잘 살아야 제사상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 올리는 방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는 여성들은 의례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큰며느리로 보이는 중년 여인의 싸늘한 표정과 절하는 장면에서 눈을 돌려버린 자세는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의례에 대한 여성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 같다. 제사상은 그녀가 차렸지만 정작 행사에는 참여하지는 못하는 것이 이 가족 속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지위인 것이다. 그녀는 주체적 인간이기 이전에 한 집의 며느리이다. 며느리에게는 주체적 삶을 사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말투와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신경 써야 하는 며칠동안의 생활은 그래서 힘들다. <김부남의 집-추석>에서의 여자와 <길례와 정하-두 여자>의 여자는 얼마나 다른가. 전자는 시댁 간 며느리이고 후자는 친정 간 딸인 것이다. 친정 간 딸 또한 며느리의 지위를 같이 가졌으며 시댁 간 며느리 역시 친정엄마의 딸이지만 두 지위가 가져다주는 표정과 태도의 차이는 크다.

여자의 분신

주체적 삶을 살기 힘든 조건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식한 여자는 차라리 그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체념과도 같은 수용을 통해 여자는 자신이 못 산 인생을 아이를 통해 대신 살려는 욕심을 부린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보상심리와도 같은 것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주체성을 아이에게서 확인하고자 하는 절박한 자아의 몸부림이다. 나의 삶을 살 수 없는 인간의 삶을 무어라 불러야 할 것인가. 그래서 엄마의 삶을 대신사는 아이는 곧 엄마의 주체성에 따라 사는 분신과도 같다. 여자의 이러한 기이한 삶을 보여주는 작업이 <Twins> 연작이다.

<연이와 정윤>이나 <태화와 희지>에서 볼 수 있듯 엄마는 아이를 자신의 분신처럼 키운다. 아이의 방이 이토록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을 리가 만무하지만 엄마는 아이를 위해 모든 정성을 쏟는다. 공주처럼 키우는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자신의 아이가 실제로 공주라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주의 삶을 살아보지 않은 엄마는 막연한 상상에 따라 아이를 그렇게 키운다. 자신이 그렇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작 자신의 삶은 공주가 아니라 하녀의 삶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딸아이를 벌써부터 공주로 키운다. 몸에 베어 있어야, 스스로 공주라 생각해야 그렇게 살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인과 가은>은 백설공주와 신데렐라의 옷을 입고 자라며, <희선과 지선>은 왕자님이 찾아 올 성처럼 꾸며진 방에서 생활한다. 작가는 <Twins> 연작에 등장하는 모델로 모계의 영향을 직접 받은 이란성 쌍둥이를 선택하여 그녀들이 엄마의 분신임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공주의 삶을 사는 이 아이들은 엄마가 살고 싶었던 삶을 대신 살고 있는 셈이다. 공주의 삶이란 막연한 환상에 가까운 것임을 교육수준이 높은 이 엄마들이 모를 리 없건만 회한은 명철한 인식을 흐릴 만큼 거대하다. 그래서 한 발 물러나 비록 공주의 삶은 못되더라도 그것에 가까운 삶은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엄마들이 아이에게 거는 기대가 된다. 그렇게 해서 교육은 딸아이가 상류사회에 머물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상류사회에 머물러 있어야 왕자님을 만날 기회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주체적 삶을 살지 못한 안타까움이 차곡차곡 쌓여 회한이 되고 응어리가 되고 그것이 다시 마음의 병이 되어버린 여자들은 자신의 분신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렇게 자란 아이들 또한 주체적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들은 일찍이 주체적 삶을 향한 염원을 버리고 안락한 공주의 삶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능력 있고 부유한 남편이 구축한 풍요로운 가정에서 가족을 위해 사는 편이 구질구질하고 힘들게 사는 주체적 삶보다 낫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의 권력

작가는 이제 그 동안 관찰해 온 여성들의 삶과 가부장적 질서가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모습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특정 지역을 표본으로 설정하여 작업에 임한다. 그것이 강원도의 산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의 모습을 추적한 <도계 프로젝트>이다. 도계는 주로 광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대개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이주하여 명절이 되어야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마을이다. 여기에서도 작가는 그 동안의 작업 과정에서 보아 온 가부장적 질서의 흔적을 도처에서 확인한다. 그 질서는 권력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기본 질서는 가부장이 지닌 권력에서 나온다. 그것은 실제적 권력이라기보다는 집단의 구성원 모두가 그 앞에서 복종하기로 결정한 데서 나온 추상적 권력이다. 따라서 그 권력의 지배력은 권위와 위엄을 통해 행사된다. 권위와 위엄을 갖추지 못한 가부장이란 상상하기 어렵다. 가족의 구성원 중 누군가가 가부장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대들 때 그의 권력은 심각하게 훼손된다. 한 번 침해받은 권위는 다시 회복하기 어려움을 알기에 가부장은 항상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비록 추상적 권력이라 할지라도 권력은 권력이어서 가부장제 하의 가족질서는 엄격한 권력관계를 통해 유지된다.

작가는 이미 자신의 첫 전시 <황금투구>(에서 이러한 문제에 천착하여 가부장의 권위와 위엄을 로마시대 황제의 모습을 메타포로 하여 들추어냈었다. 그 작업에 등장하는 황제의 위엄은 가식적인데다가 통속적인 측면까지 있어 사람을 압도하는 무게감 있는 위엄이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현대사회에서의 가부장의 권력 또한 그런 측면이 없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가부장적 질서가 통용될 수 없는 사회에서 그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권위가 없는 사람에게 위엄이 있을 리 없고 권위와 위엄이 위탁한 권력 또한 지배력을 가질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를 내세우는 가부장의 모습은 <황금투구>에 등장하는 위엄의 옷을 걸쳐 입은 황제와 닮았다.

노부부가 방안에서 식사하는 장면을 촬영한 <천순랑의 집>은 우리 시대 가부장의 초라한 모습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다. 뒤편의 장식장에 진열된 가족들의 기념사진은 이 가부장의 초라한 몰락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그의 전부였음을 암시한다. 특히나 학사모를 쓴 아들의 졸업사진은 그에게 후광과도 같다. 일생 동안 그의 동반자였던 아내는 여전히 옆에 앉아 조력자의 역할을 묵묵히 하고 있으며 비록 시대는 변했어도 소주잔을 앞에 둔 가부장의 모습에는 은근한 위엄이 서려 있다. 가부장의 권위가 사라져가는 것은 권위를 내세울 가족 구성원들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이 되면 고개 숙였던 권위는 다시 살아난다. <신이종의 집-성묘풍경>에 등장하는 가부장의 모습은 위풍당당하기 그지없다. 위엄으로 살아 온 가부장에게는 그야말로 신명나는 날인 것이다.

이선민이 우리 시대의 가족관계에 천착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여성의 주체적 삶과 자유의 실천 가능성에 관한 것임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여성의 지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핵가족 제도가 일반화되면서 대가족 제도가 지닌 여러 가지 모순과 부정성은 어느 정도 극복된 듯 해보이지만 또 다른 문제점은 계속해서 발생한다. 대가족 제도에서 존재했던 남편과 아내 사이의 대립구도를 완화시켜 줄 완충장치는 사라져 이제 가정에는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적 구분만이 남게 되었다. 주체적 삶에의 의지가 강한 여성과 가부장제 하의 정서를 그대로 물려받은 남성에게 가정은 극단적인 대결의 장으로 변한다. 이러한 모습은 사회의 축소판과도 유사하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제도의 개선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변할 수 없다. 가족도 하나의 제도라면 그 또한 개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가족은 제도임과 동시에 하나의 사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족 사회를 유지하는 제도, 혹은 규범이 필요하다. 바꾸어나가야 할 것은 가족을 지탱하는 규범이다.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지만 여성의 주체적 삶을 허용하는 제도와 사회적 규범은 여전히 미진하다. 최소단위의 사회인 가족 공동체에서부터 그렇다. 작가는 제도와 규범의 변화는 우선 가족 단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집에서 주체적으로 살 수 없는데 세상에서 어떻게 그리 살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