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MIN LEE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 소통과 존엄을 향하여

이선민

보물을 찾아 떠나는 주인공, 결말이 좋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 위한 주인공들의 몸부림,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결투, 갈림길과 결정적 선택, 불을 뿜는 용…이런 요소들은 많은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과 옛이야기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사용되어지고 전해져 왔던 것들이다.

'Translocating Women'전은 자신이 나고 자란 땅을 떠나 낯선 도시에 도착한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동남 아시아의 작은 땅 캄보디아로부터 또 다른 아시아의 작은 땅 대한민국으로, 대륙의 횡단을 감행한 이 여성들의 일상과 소망이 성남 태평동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46년간 대한민국 땅을 한번도 떠나지 않고 정주했던 내가 대륙을 횡단한 이들의 여정에 동행했던 것은 참 낯선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다소 뜬금없이 지난 13년간 가족과 여성을 대상한 인물 작업을 해왔던 사진가가 이주와 디아스포라라는 테마로 방향을 선회하여 성남 태평동에 거주하는 국제 결혼을 통하여 한국에 입국한 이주 여성들과의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작업의 시작 또한 뜬금없이 내게 주어졌다. 7년간 해왔던 트윈스 작업을 마무리하고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다음은 어떤 작업을 할 지 고민하던 즈음으로 기억한다. 2011년 3월 어느 주일날, 다음 번 작업을 묻는 기도를 하던 중 이주 여성들에 대한 작업을 하라는 음성이 또렷이 들렸다. 제가 왜요? 전 그런 작업 못해요..라는 것이 놀란 나의 첫 반응이었다. 여성과 가족을 화두로 작업해왔던 사진가이지만 동남아로부터 국제 결혼을 통하여 이주한 여성들에 대한 르포 형식의 충격적 기사-남편의 폭력으로 결혼 한 달 만에 죽음을 맞은 베트남 신부 후안마이 사건-들과 참 좋지 않냐는 식의 정주자로서의 일방적인 시점만을 보여주는 방송 프로그램 등을 접하며 나와는 다른 세상 이야기로 밀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메세지의 여파가 쉽게 가시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할 수 없이 내가 할 수 있었던 첫 행위는 이주와 관련된 책과 기사와 방송 등을 넓은 범위에서 리서치하며 왜 이 작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스스로에게 찾아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꼬박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한 매체의 창간호에 다문화 특집 기사 원고를 실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사진 한 장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지난 일년 동안 축적한 관심과 생각과 태도와 정보와 가능성 등을 드디어 사진으로 환원할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하였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2012년 5월 2일. 나는 10년간 분당에 살면서 성남 성남 지역을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카메라를 메고 태평동의 가파른 언덕을 걸으며 그 언덕의 경사만큼 낯설었던 좁다란 골목과 유난히 푸르던 하늘 위에 어지러이 얽혀있는 전깃줄과 언덕을 오르느라 거칠어졌던 호흡과 이마의 땀을 기억한다. 모든 것이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내가 사는 분당 이매동과 성남 태평동은 전철로는 3정거장 거리이며 행정구역 상으로 같은 성남시에 소속되어 있지만 성남과 분당으로 심리적인 행정구역을 나누고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심리적 경계를 넘은 첫 촬영 스케치를 하고 돌아와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친 난 침대에 들어 누워 버렸다.

열흘 뒤인 2012년 5월 12일. 성남 태평동에 살고 있는 캄보디아에서 입국한지 9개월 된 23살의 영세 호앙과 첫 촬영을 하면서도 아직도 이 여성이 감행한 이주를 마음으로 대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너무 멀었다. 많은 사진가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태평동의 가파른 언덕과 좁은 골목, 호앙의 너무나 단출한 소지품과 임신한 그녀의 몸과 다른 피부색 등 가시적인 부분들을 집중해서 바라보았고, 이들의 이주 현실과 국제결혼 과정 등에 얽힌 사건들을 피부로 느끼며 듣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한 나의 사진적 대상이었던 대부분의 이주 여성들도 낯선 정주자, 그것도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사진가를 경계하는 태도가 너무나 완강해서 지난 10년 넘게 인물 사진 작업을 해온 사진가였지만 빈번한 거절로 인해 답답한 발걸음을 돌리기가 여러 번 이었다. 간신히 딱 분량만큼의 원고를 마감하고 그녀들과 사진가의 만남은 일년 가까이 멈추어 있었고 나로서는 역량 부족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2012년 9월 예기치 않게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2013년 말 개인전 일정이 잡혔다.

2012년 12월 이 개인전을 이주 여성과 관련한 내용으로 전시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작업을 'Trans-locating Women-대륙을 횡단하는 여성들' 이라 명명하였다.

2013년 3월. 개인전을 확정 지은 후 작업에 대한 여러 구상들이 상당 부분 좌절되는 어려움에 봉착한 후 이 낯선 사진가에게 유일하게 반가운 미소로 화답해 준 캄보디아 이주 여성 호앙과 다시 만났다. 일년 전 촬영할 때 만삭이던 아이는 어느새 돌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를 통하여 호앙의 캄보디아 친구들을 소개 받았고 호앙, 컨립, 사랑 세 친구들과 함께 밥 먹고 차 마시고 주말 농장도 함께 가고 열무도 함께 다듬고 삼겹살도 구워 먹으며 그렇게 어색했지만 카메라를 꺼내기 전 낯선 벽을 허무는 일부터 천천히 기다리는 시간을 보냈다. 명절에 낯선 집을 방문해 보자마자 인사 한번 꾸벅 하고 2박 3일 전천후로 카메라를 눌러댔던 내가 사진가 이선민의 시점으로서가 아니라 타인의 삶으로서의 그들의 일상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2013년 5월 30일. 드디어 호앙, 컨립, 사랑과 아이를 안고 장을 보는 모습을 성남 중앙시장을 배경으로 촬영하였다. 두 번째 촬영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또 이 시장에서 건어물상을 하는 나라츠의 시어머니와 남편과의 촬영도 이들의 소개로 흔쾌히 허락되었다. 이 후로 무더웠던 2013년 여름 많은 시간을 성남 태평동에서 보내며, 새벽 4시에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 입국하는 호앙의 동생 헤앙을 공항으로 함께 마중 나가기도 했고, 호앙이 이사 가는 날 아들을 돌봐주고 함께 짜장면도 먹으며 점점 이들과 유대감 같은 것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2013년 7월 26일. 호앙의 이사 풍경도 촬영하고 돌 지난 아이도 돌보아 줄 요량으로 어시스트와 함께 그녀의 집을 일찍 방문했다. 10시도 안된 시간이었는데 호앙 집의 이삿짐은 벌써 2톤 트럭에 실려 골목에 서 있었다. 참 단출한 이동이었다. 그런데 호앙의 얼굴 표정이 안 좋았고 몸이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순간 사진가의 뇌 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이사 풍경을 담을 요량으로 메모리 카드랑 어시스트랑 단단히 준비하고 왔는데 모델이 아프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난 이삿짐 앞에서 유모차를 잡고 있는 호앙을 한 컷 촬영하고 카메라를 접어 가방에 넣고 어시스트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호앙의 아들 민찬이를 안아 받고 사진가로서가 아니라 15년 전 내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다니던 엄마로서의 기억을 회상하며, 20년이나 어린 호앙의 아들을 데리고 촬영 첫 날처럼 성남 태평동의 언덕과 골목을 유모차를 밀고 두 세시간 거닐었다. 무더운 여름날이었지만 골목의 그늘은 더위를 피하기에 충분했고, 정겹고 고요했다. 꼭 유년 시절 내가 자라고 누비던 수유리의 골목길처럼 말이다. 이 날이 Translocating Women 작업의 마지막 촬영 날이었다.

2013년 10월 16일. 호앙과 컨립과 사랑이 아이를 안고 분당 우리 집에 처음으로 놀러 왔다. 밥 먹고 차 마시며 아이스크림도 먹고..자기들끼리 신나게 캄보디아 말로 떠들고 사진 보고 쓰러져 웃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철부지 소녀들이었다. 이 날 저녁, 어려 보이는 동남아시아 여성 3명이 돌 갓 지난 아이를 안고 나와 함께 우리 집을 나서는 것을 본 세탁소 아줌마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그들이 누구며 왜 나와 함께 다니냐며 호기심을 발산했다. 그 세탁소 아줌마가 이들을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까지 조금의 시간이면 될 것이라 생각해 본다. 그녀 역시 아이를 안고 돌본 모성적 유대감을 공유하고 있으며, 또 그러한 직접적 경험의 여부를 떠나서라도 이 모성이라는 단어 속에 압축된 돌봄과 소통과 사랑과 관심을 추구하는 마음이 모든 이들의 심연 중에 원천적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 다르다고 등 돌리고 분류해버리는 관계 안에는 진정 너무 다름에서 오는 차이 보다는 유대감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확보되어야 할 시간과 낯설음을 견디어 우정에 도달하는 불편한 과정을 감내할 의지가 부족한 것은 아닌지 생각 해 본다. 세상의 국경이 희미해지고 수 많은 사람들이 공항과 항구를 통과하는 이주의 시대 속에서 이런 낯선 과정을 극복하고 친밀한 관계망을 확보했을 때 우리의 인식이 다르다고 분류해 놓은 많은 편견들을 뚫고 소통과 존엄을 담보할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그렇게 지난 3년 간, 이들의 여정을 동행하면서 불현듯 어려서부터 들었던 옛이야기들이 떠오르고 또 내 삶의 모습과 비슷한 가락들을 이들의 일상 속에서 느끼며 비로소 나도 이들과 편안히 걷게 되었던 것 같다. 부족하지만 또한 정직한 마음으로 나의 여정이 여기까지였음을 고백한다. 처음 너무 멀게만 느껴지던 이들과의 차이와 낯설은 상황에 카메라를 내려 놓고 사진가의 타이밍이 아니라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타이밍을 기다리면서, 예상치 못하게 내 유년 시절 미처 화해하지 못했던 모성에 대한 그리움을 발견하고 나와 그녀들과의 연대가 시작되었던 순간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지난 여성과 가족에 대한 작업들이 진정한 여성성과 가족의 의미를 묻는 과정이었다면, 이번 작업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이주 여성들의 모습 속에서 건강한 모성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했고, 그렇게 나와 그녀들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이야기를 희망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영 멀게만 느껴지던 이들과의 만남 중에 내 자신 유년의 트라우마와 화해를 시작했듯 모델이 되어준 이주여성들도 이 작업 과정을 기분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게 되길 바란다. 또한 이번 Translocating Women 작업이 다름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소통과 공감을 시도하는 사진가의 작은 제스츄어로 관객들에게 전해지고 그들에게도 울려지기를 기대한다.

낯섬과 편견, 상처의 기억들을 뚫고 선뜻 사진가의 여정에 동행해준 호앙, 컨립, 사랑, 사만, 미니어, 깜뚜, 나라츠, 김현정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특별히 작업의 진행 단계마다 적절한 조언과 명철과 진정의 글로 나의 부족함을 메워주신 문영민 선생님과 언제나 응원과 격려로 함께해준 나의 가족 인구와 자윤, 성우에게 감사한다. 작업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중심을 잡아준 그림책 작가 지혜라와 편집과 프린트 과정에 지혜를 더해주신 최봉림 선생님, 새로이 시작하는 이번 작업의 가능성을 독려해 주신 구본창 선생님, 전시의 면면들을 두루 도와준 박진영 작가, 전시 공간을 제공해 주신 룩스 갤러리 심혜인 관장님, 작업의 마무리 단계에서 글의 중요성을 환기해 준 윤정미 작가, 전시 프린트를 도와준 강재구 작가, 도록을 제작해 준 디웍스의 최진수 실장, 문영민 선생님의 전시 서문과 나의 작가 노트를 감수해 주신 콜럼비아 대학 출판사의 이창재 수석 디자이너와 레슬리 크리셀 편집 팀장에게 특별히 감사 드리며, 항상 기도와 관심으로 후원해준 모든 분들, 서울문화재단, 캐논 코리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만남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