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MIN LEE

여성과 가족 의식의 공시적 연구

최봉림 (사진평론가)

이선민의 <여자의 집>은 ‘여자라서 행복해요’라는 광고 문안이 TV 화면에서 속삭이는 지금, 노년 여성의 ‘고달픈 인생길’의 흔적과, 여성과 여성, 여자와 가족의 상호 관계를 포착한 작업이다. 즉 오늘날 핵 가족구조 속에도 남아 있는 여성의 전통적 역할과 그들의 사회 심리적 변화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작가는 이를 위해 여러 연령층의 여성들이 함께 모이는 집안 행사, 명절 등을 촬영일로 택하거나, 아니면 노부모와 함께 사는 가족을 촬영대상으로 선정했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여인상이 각 연령에 따라 얼마만큼 잔존하고 있으며, 어떻게 굴절됐는지, 그리고 ‘여자라서 행복한’ 시대의 징후들은 가족관계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그런데 작가는 객관적 거리를 둘 수 없고 애증의 심리가 얼기설기 뒤엉킨 자신의 관점을 주변 친지들에게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보여주는 ‘시각적 무의식 the optical unconscious’ -이는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용한 용어다- 을 통해 현재를 사는 여자들의 다양한 속내를 파헤치고자 했다. 감추고 포장하려는 의식은 물론이고 무의식적 동작, 표정까지도 여지없이 포착하는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여자이기 때문에’ 불행했던 시절의 여성성과 ‘여자라서’ 행복하다는 광고 문안이 등장한 오늘날 여성 현실의 공시적 연구를 행하고자 했다.

일례로 할머니와 손자, 손녀에 대한 사회 심리적 변화양상을 살펴보면, <여자의 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시선을 공통점으로 하고 있다. 즉 아이들은 할머니에 대해 주목하지 않으며, 할머니들도 손자에 대해 어떤 정겨움을 표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품을 떠난 아들, 딸에 대한 집착을 손자, 손녀로 대신했던 옛 할머니의 ‘맹목적 사랑’이 핵가족 제도와 더불어 사라져 버렸고, 할머니를 ‘늙어버린’ 엄마로 인식하던 아이들의 심리도 지워져 버렸음을 암시하는 징후이다.

이러한 상황은 여자들의 상호 관계에도 적용된다. 손위, 손아래에 따른 전통적 위계질서, 유대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3명의 여성이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장면에서건, 4명의 여성이 마루에 앉아 있는 장면이 됐건, 그들의 시선은 친밀한 혈연의식 blood intimacy을 드러내지 않는다. 서로 고립된 섬처럼 앉아 자신의 방향만을 응시할 뿐이다. 친정엄마 혹은 시어머니, 딸 혹은 며느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노년 여성은 재봉질에 전념하고, 여인은 물끄러미 그녀의 등만을 바라볼 뿐이다. 외출을 준비하는 젊은 여인은 의자에 앉은 어머니에 대해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으며,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이선민의 사진 어디에서도 여인들은 다른 여성에 심리적으로 기대거나, 상대방의 관심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억압의 부산물인 전통적인 ‘한’은 생겨날 수 없다. 자신의 독립성과 개성을 중시하는 상황에서 무조건적 인종, 헌신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선민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여성들은 분명 연령에 관계없이, 삶의 경제적 조건과 관계없이, 혈연에 대한 무조건적 애착, 위계질서를 존중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여자라서 행복한’ 상태는 분명 아닌 듯하다. 이선민의 사진에 나타나는 여성들은 여전히 제사 준비와 같은 대단위 가사노동을 전담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차린 제례의식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음식을 남자들과 함께 공유하지 못하고, 뒤늦게 따로 떨어져 먹는 관습조차 여전히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유교적 남녀 차별 전통이 빚어낸 ‘설움’이 사라졌다고 애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여성들이 봉건적 남성지배에서 해방되었을지라도, 그리고 개인의 자율성을 확보했다 할지라도, <여자의 집>은 그리 행복하지 못한 듯하다. 작가는 카메라의 ‘시각적 무의식’으로 포착한 시선들의 상호관계를 통해,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유대감이 적지 않게 손상된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들이 신체적으로 상호 근접하는 <여자의 집>에서 노년 세대와 젊은 세대의 시선은 언제나 만나지 못한다. 제사, 명절이라는 가족 유대의 시간 속에서도 비좁은 실내를 오가는 시선들은 서로를 향하지 않는다. 전통을 기리는 시간에서 조차 가족들의 시선들은 언제나 조금씩 비켜간다.

작가는 3세대에 이르는 친족 구성원들의 무의식적 행동양태, 표정들을 의미심장하게 포착하여 전통적 가족의식이 해체되는 징후들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향수도, 페미니즘도, 억지 연출도 없이 자연스럽게, 여성의식의 변화와 가족의식의 변모를 현재의 시간에서 공시적으로 잡아내는 통찰력을 발휘했다. 그리하여 <여자의 집>은 ‘여자이기 때문에’ 불행했던 노년 세대와 ‘여자라서 행복한’ 신세대까지 흩어진 가족들을 부르고, 음식을 나누는 전통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까 의심하게 만든다. 마주칠 수 없는 시선들을 모으는 전통이 과연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케 하고야 마는 것이다.